아티스트/아티스트김수현

훤데이김수현 “<해품달>이 소중하다, 날 무릎 꿇게 해줘서”

이뽄 2012. 4. 3. 10:48

 

MBC <해를 품은 달>의 강행군을 마치자마자 쉴 틈 없이 이어진 일정에 다소 지쳐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나이보다 앳된 얼굴로 해맑게 웃는 김수현과 마주하자, 그에게 그토록 많은 여심이 앓았다는 사실이 어쩐지 조금 현실감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요”와 “~습니다” 사이, 진지하지만 경직된 얼굴과 흐느적거리며 자연스러운 몸짓 사이, 김수현은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수현의 얼굴은 적절한 답을 고르고 이를 제 속에서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람과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다소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입술을 씰룩거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바짓단을 만져 보는 모습이 좀 편해진 듯 보였다. “저는 좀 야심가예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스물둘의 김수현은 “회사와 열심히 상의해보겠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스물다섯의 남자가 되었다. 작품의 힘이 아니라 배우의 힘으로 시청률을 견인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스타가 되게 해준 훤을 거치며 그는 어떤 것을 얻고 또 어느 것을 잃은 듯 했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성장의 결과다. 모든 성장이 그러하듯 그 모습이 많이 대견하고 조금 아쉬웠다.





엄청 어렵고 까다로울 것 같은 시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는데 막상 받아든 시험지가 생각보다 쉬웠다면? 결과적으로 어쨌든 시험을 망치지 않았고 좋은 성적을 받아 칭찬을 받았으니 된 걸까? 아니면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까? <해를 품은 달>의 마지막 회에서 훤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문득 궁금했다. 예전에 김수현이 그러했듯 단지 아역이 아니라 탁월한 해석과 완결성을 가진 배역으로 그려낸 여진구의 어린 훤에게서 바톤을 넘겨받아 그가 성인 훤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가 굉장히 많이 준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인 동시에 한 명의 남자로서의 이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지만 자리에 걸맞은 권력은 쥐지 못 했고, 영리하게 판세를 분석하지만 이를 이용하거나 뒤엎기엔 아직 어리고 강건하지 못 한 왕. 어린 시절의 큰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짓누르고 그로 인해 때로는 히스테릭하고 공격적인 면을 숨기지 못 하는 덜 자란 왕의 치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김수현의 이훤은 점점 로맨스의 도구로 소비되었고 그가 준비한 여러 얼굴은 충분히 보일 기회를 잃었다.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보거나 하는 건 예전에 입시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데 그 때는 별로 기분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독백도 준비하고 특기도 준비하고 질의응답 이런 것도 열심히 준비해서 갔는데 막상 교수님은 저를 별로 궁금해 하지 않으셨거든요. 나오면서 ‘아, 허허, 아’ 이런 기분이었어요. <해를 품은 달>도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외부적인 이야기가 많았고 중간에 한 주 쉬기도 하면서 좀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도 있고 갑작스레 방향을 이쪽으로 틀어서 흘러간 느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쉬웠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를 품은 달>을 위해 준비했는데 여기서 그걸 못 했네’라는 기분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니까요. 뭐 사실 그렇게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수현은 또래 배우들 사이에서 안정적인 연기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런 그에게도 첫 사극이자 명실상부 주인공인 <해를 품은 달>의 훤은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판타지 멜로 사극 속 가상의 왕. 까마득한 선배들이 먼저 연기했던 왕이 아니기에 참고할 수 없지만 비교당할 위험은 적었다. 하지만 원작이라는 피할 수 없는 커다란 태양이 있었다. 다행히도 탁 트인 발성, 낮고 진중하지만 청년다운 청아함이 스며들어 있는 음색, 그리고 사소해보이지만 실로 제일 중요한 띄어 읽기까지 사극 대사의 기본이 체화된 그의 첫 대사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은 훤으로서 첫 마디를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늦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제작발표회를 할 때까지 훤으로 한 마디도 못 해봤어요. 이렇게 시간을 많이 써 가면서 고민도 많이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막상 스스로 실망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었요. ‘아직인가, 아직인가’ 하면서 많이 혼란스럽기도 해서 좀 오래 걸렸는데 한 마디 한 마디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가상의 왕인만큼 참고할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더라구요. 당시 SBS <뿌리깊은 나무>가 한창 방영되고 있어서 열심히 봤는데, 한석규 선배님이 나오셨잖아요. 보고 있으면 굉장히 빨려 들어갔고, 그 덕분에 드라마도 굉장히 재미있어서 참 재미있게 보고나서 드는 생각이 ‘내가 저 연기를 할 수 없잖아’였어요.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낸다고 해도 될 게 아니고. 그래서 원작에만 집중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밖으로 표현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좀 막막하던 때가 있었는데 문득 만화책이 하나 떠올랐어요. <창천항로>라고, 삼국지인데 조조를 주인공으로 놓고 각색한 만화책입니다. 아직은 어리고 젊은 조조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정치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 때로는 영리하고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한 없이 순수한 훤의 매력과 비슷해서 힘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4년 전, 한 드라마의 제작발표회에서 난데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 난 스타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주목하는 이가 많지 않은 청소년드라마였기에, 조금은 느긋한 분위기가 감돌던 실내의 공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당시 KBS <정글 피쉬> 한재타 역으로 첫 주연을 맡은 스물한 살의 김수현은 “15가지 버전”이나 준비하고 이를 자신 있게 감독님 앞에서 보여주며 열성을 다했건만 정작 화면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 울어버렸다고 했다. 사실 김수현과의 인터뷰를 기대했던 건 지금 그가 가장 뜨거운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던,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연신 반복하며 울먹이던 그 때 그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을 하는 내내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좌절하기도 했는데 그런 기분이 굉장히 오랜만이었어요. 특히 방송 다음 날이면 모니터를 하고 나서 가장 침울해졌어요. 아쉬운 게 너무 많아서. 사실 훤을 연기하는 건 남자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제가 표현해 낸다면 굉장한 기회잖아요. 왕으로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쥐었다 놨다 하면서 한 수, 두 수 멀리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선배님들인 대신들을 조종하고 장악했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제가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아직은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오히려 제가 기가 죽어서 먹혔던 적도 있고. 예전에 어떤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는 확실히 좀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는 못 할 것 같고. 뭐든지 조금 알게 되면서 겁을 먹기 시작하잖아요. 그 때가 어떻게 보면 더 행복한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겁을 먹은 만큼 궁극적으로 제가 하려는 연기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 않았나 싶어서 좀 뿌듯하기도 하고. 뭐 그 덕분에 말도 못 하고 그랬지만. 스트레스를 심하게 많이 받았고 촬영하는 도중에 이렇게 좌절한 건 또 처음이라 굉장히 막막했어요. 그래서 이 작품이 소중한 것 같아요. 이렇게 무릎 꿇게 해줘서. (웃음)”



<해를 품은 달>은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작품의 완성도가 시청률과 비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캐스팅 논란부터 유난히 밭은 촬영 현장과 파업으로 인한 결방 사태까지 이런 저런 악재가 겹쳤지만 김수현이 있었기에, 작품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있었다. 작품의 흠결까지 눈 감고 싶게 만드는 힘, 이것이 바로 ‘스타’의 힘이다. 2010년 KBS <드림하이> 송삼동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입증했고, 이른바 ‘김수훤’이라 불리었던 <해를 품은 달>의 훤을 통해 그는 드디어 연기력이 차지하고 남은 한 쪽 어깨에 스타라는 견장까지 달았다. 이는 그가 자신의 이름 위에 짊어져야 할 책임이 더욱 커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우선 지금은 <해를 품은 달>에서 받은 숙제들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촬영하는 내내 연마와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은 실력이 어떻고 뭐 그런 것보다 인간으로서 좀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무래도 많이들 받들어주셔서 높이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좁아질 수 있잖아요. 저는 이 상황을 이용해서 오히려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작품을 보려고 합니다. 아직은 저를 되돌아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시간이 되면 빨리 정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게 맞는 배역이나 소화할 수 있는 연기, 그런 식으로 선을 그어 놓지 않으려고 해요. 최대한 다 덤벼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고. 도전자... 허리케인? 으허허허”



스타의 또 하나의 숙명은 대중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김수현을 궁금해 할 것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 안은 물론 카메라 밖의 얼굴까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인해 원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다. 모두가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궁궐 속의 왕처럼 말이다. 김수현이 예전에 닮고 싶은 배우라고 꼽았던 장근석은 김수현에 대해 “빨리 따라 와라! 날 추월해줘! 자극 받게”라고 말했다. 장근석은 아무리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모습으로 사는 길을 최우선으로 놓았다. 그 모습에 대한 평가는 갈렸지만 적어도 그가 흥미로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배우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야심이 좀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던 김수현도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했다. 스타가 될수록 겸손이 미덕이 되는 이 나라에서, 과거보다 훨씬 많은 눈이 지켜보는 길 위에 선 그는 어떤 각오를 하고 있을까.

“음... 사실 그걸 아직 결정을 못 했어요. 하고 싶은 건 있습니다. 줄타기! 경계를 잘~ (웃음) 아직은 어느 게 맞다 틀리다를 몰라서 그런 부분은 회사와 열심히 상의해보겠습니다. (웃음) 사실 지금으로서는 김수현이라는 인간을 드러내놓기에는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겁을 내는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만 알려지고 있는 상황이 싫지 않고. 하지만, 금세 다 드러나지 않을까요? 글쎄, 어떻게 될 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세상에 맞춰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인터뷰 도중 김수현이 가장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은 “예전에 ‘왼손잡이에 곱슬머리 AB형’인 자신이 좋다고 말했어요. 남들과 조금 다른 내가 좋다는 거였는데 여전히 그런가요?”라고 물었을 때였다. 그는 철없던 시절의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처럼 쑥스러운 얼굴로 크게 웃더니 “예, 좋아합니다. 이유를 꼽자면 아직은 제멋대로여서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웃음에 인터뷰 내내 조금씩 쌓였던 아쉬움의 무게가 덜어졌다. 과거 김수현은 덜 깎인 원석 특유의 거침없는 매력이 있는 인터뷰이였다. 각진 부분이 지면과 만나 내는 떼구르르 혹은 덜컹 덜컹 하는 경쾌한 소리가 예상치 못 한 순간 들려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의 경이로운 성공 이후 “저를 되돌아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소 경직된 그의 운신은 예전보다 조금 무거운 듯 보였다.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 위태로움은 보는 이를 걷잡을 수 없이 매혹한다. 여심을 뒤흔들었던 남자 스타들의 공통점이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존재하는 ‘소년성’인 것처럼. 훌쩍 자란 남자의 몸에 덜 자란 소년의 얼굴을 지닌 이 스물다섯 청년에게 우리가 미혹된 것 역시 그가 경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줄타기”를 하고 싶다고 말 하는 그가 지금을 좀 더 즐겼으면 좋겠다. 아직은 조금 더 위태로운 채 미완의 불안한 걸음으로 줄 위를 가벼이 “제멋대로” 날아다녀도 좋으니 말이다.

 

 

출처: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a_id=2012032910314802946